Remind
“이거 답답해.”
마냥 무뚝뚝해 보였지만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툴툴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늘 편한 티셔츠만 입어오다가 이것저것 더해 걸친 데다가 넥타이까지 맸으니 그리 느낄 법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둘 순 없었다. 오고 가는 게 있었던 만큼, 내게는 의뢰인이 제공한 일거리를 제대로 해내야하는 책임이 있었으니까.
“기다려. 오랜만의 부탁이었는데 이렇게 굴 거야?”
목에 꼭 맞게 둘러진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기 위해 틈을 벌리던 네 손을 저지한 뒤, 다시 조여 모양새를 갖춰주었다. 이래야 보기 좋지.
“알았어.”
너는 반사적으로 뒷머리를 헝클이려다 멈춘 대신 오른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고쳐 메고 먼저 식장 안쪽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에 귀찮음이 뚝뚝 묻어났지만 과정이야 어땠든 일단 수락했으니 마지막까지 같이 어울려주겠다는 저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이었다.
이번 사건은 얼마 전 청첩장을 들고 온 한 쌍의 선남선녀로부터 시작됐다. 그들은 곧 치룰 결혼식을 며칠 남겨두고 협박 전화 한 통을 받았다고 했다. 울분에 받친 목소리로 ‘당신들만 행복하게 살도록 놔둘 줄 알아?!’ 라는 뻔한 소리를 지껄이길래 무시하려 했지만, 다음날 죽여 버리겠다는 붉은 글씨가 큼직하게 적힌 청첩장이 돌아왔단다. 예비 신랑이 건넨 청첩장을 펼쳐보니 하얀 종이 위에 새겨진 검은 글자에게 결례를 범해가며 ‘KIL YOU’가 거의 그려지다시피 적혀있었다.
“쓰다가 배고파서 L은 하나 집어먹었나?”
“그런데 그거, 저희 청첩장이 아니에요. 알고 보니 윗집 거더라고요.”
“……?”
울며불며 떼쓰듯 전화했다는 것도 그렇고. 철자도 하나 훌륭하게 빠뜨렸고. 심지어 청첩장의 주인공도 틀렸고.
다분한 충동에서 줄줄 샌 허술함에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턱을 괸 채 탁자에 놓인 종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슨 말씀이 하시고 싶으신지 알 것 같네요.”
예비 신부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결혼식을 두 번 올리려고 해요.”
“원래 예약한 곳에도 식은 진행되지만, 진짜 식은 다른 곳에서 올린다… 이건가?”
“네. 이미 전화로 한 분씩 확인해가며 바뀐 장소도 알려드렸고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잘 알았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내게 뭘 의뢰하고 싶은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대비책도 세운 마당에 딱히 내가 들어설 만한 자리가 있어 뵈지 않았다.
“그 말은 즉…”
“그러니까 쟈그라 씨께서는… 그곳에서 가짜 결혼식을 올려주셨으면 해요.”
막무가내에 가까운 일을 의뢰하는 바람에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들던 손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다 쏟을 뻔 했다.
내게 뭘… 맡기려 한다고?
“구태여 그걸… 내게 의뢰할 필요가 있나?”
“그 사람이 정말 죽이러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평범한 분들께 의뢰를 드릴 수가 없겠더라고요.”
우려하는 바가 이해는 됐지만 이성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됐어. 없던 일로 하지.”
“쟈그라 씨, 잠깐만요…!”
가짜 결혼식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도 없이 어떻게 연기를 하라는 건지. 값을 얼마나 쳐주던 애초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의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 때. 찻집 문이 열리면서 청량하게 울린 종소리에 뒤이어 한 사람이 들어왔다. 모자를 벗으며 자리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그는 정확하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너도 있었어?”
너와 나 사이에 정적이 흐른 것도 잠시였다. 이렇게 우연으로 마주치는 것도 흔해졌다보니 이제 둘 다 반가운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빈자리가 없는데 같이 앉아도 되지?”
대답할 말미도 주지 않은 채 너는 성큼성큼 다가와 당연하게 내 옆자리를 차지했다. 덕분에 나는 안쪽으로 밀려나며 엉겁결에 다시 앉고 말았다. 이 자식,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비켜. 난 볼 일 끝났으니까.”
“사장님, 여기 주문이요-”
허어, 도대체 심보가 어떻게 비틀렸나.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겠다, 이거지?
“나오라고. 네 녀석이랑 달리 난 바쁜…”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석처럼 버티는 널 밟고서라도 나가려다가 문득 뇌리에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너 지금 한가하지, 가이?”
“뭐 그렇지. 그건 왜?”
약한 의문을 품어 비대칭으로 구부러진 눈썹이 미심쩍게 쳐다봤지만, 회심의 미소로 응수해주었다.
“거기 총명한 신부 씨.”
“네?”
“이 자의 몫까지 쳐준다면, 의뢰 받아들이지.”
일을 맡아줄 거라는 희망 같은 미련이 남아 차마 떠나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이던 예비부부는 불쑥 끼어든 불청객 하나 때문에 혼란스러워도 하다가 갑작스런 호명에 놀랐다. 하지만 눈치는 제법 있는 편이었는지 허둥거리는 대신 재빨리 쾌답을 내놓았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와중에 주문을 마치고나서야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너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마음 놓고 환히 웃으며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니 더욱더 도로 물릴 수 없었다. 네가 날고 뛰어봤자 이 상황에선 어설픈 미소만 짓다가 사실을 받아들이고 한숨을 쉬는 것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온통 새하얀 이 식장에 나란히 서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비용은 의뢰자 측에서 전부 지불해준다고 했으니 가장이라지만 이왕 식을 올리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심산으로 준비했다. 그래봤자 이미 대부분 정해져있던 터라 입을 정장을 맞추는 것 정도였지만.
셔츠는 둘 다 똑같이 하얀색으로 걸쳤다. 거기에 너는 따듯한 쪽빛 정장과 회색이 옅게 감도는 베스트를 입었고 청명한 하늘을 뽑아서 촘촘히 짠 넥타이를 둘렀다. 나는 깔끔한 검은 정장에 평소와는 색다른 타이를 매어 마무리했다. 아래를 향하도록 겹겹이 매듭지은 붉은 리본과 그 위에 에메랄드 브로치를 얹은 타이로.
커다란 호수 근처에 자리한 식장은 한쪽 벽이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서 나른한 오후 햇살이 담뿍 내리 들어왔다. 식이 시작할 시각은 지났고 간만에 더 신경 써서 차려 입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어디선가 열리고 있을 그들의 진짜 결혼식이 끝나기를 기다릴 뿐. 그간의 시간을 낭비할 마땅한 놀잇거리도 없었다. 때문에 맨 앞줄에 대충 앉은 너는 장식용 꽃을 하나 집어 손가락 사이로 빙글빙글 돌리며 창 밖 풍경에 줄곧 시선을 두었다.
원래대로라면 주례가 있어야 할 순백의 단상에 턱을 괴고 비딱하게 서서 그런 널 바라보고 있자니 이렇게 단둘이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싶었다. 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졌을 때 재회했던 터라 그걸 부지런히 해결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기 일쑤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걸핏하면 내 도발에 넘어가 으르렁거리는 너도 없었고 어리석은 네 행동 때문에 온 감각을 곤두세운 나도 없었다. 같은 공간에 오롯이 너와 나만이 존재하며 잔잔히 흐르는 시간 속에 느긋하게 발을 담근 채 그것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봄눈 녹듯 사르르 풀린 마음에서 장난 어린 진심이 한 송이 꽃으로 톡 피어나고 말았다.
“그대는 나를 반려로 맞이하고 심장이 멎는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대답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식장에 들어오기 직전, 직원이 억지로 쥐어준 부케까지 살랑살랑 흔들었으니 너는 군말조차 없이 지긋지긋하단 얼굴로 넘겨들을 테니까. 언제나처럼 그럴 줄 알았는데.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뜻밖의 반응이라 살짝 놀란 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바로 가까이 온 네가 날 천천히 돌려세우면서 우리는 서로 마주하게 됐다.
“네. 맹세합니다.”
망설임 없이 딱 떨어진 대답.
그러고선 부케를 든 내 손을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고 물어왔다.
“그대도 나의 반려가 되어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의 탄생과 소멸을 하나씩 담던 까만 눈은 지금, 온전히 나 하나만을 비추었다. 거기에 화답하여 나 또한 시야를 온통 너로만 채워 넣었다.
“네. 맹세합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고개를 숙여 서서히 내게 밀착했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무언갈 더 바라고 말았는지 스르륵 눈을 감았고 이내 이마 위로 포근한 입맞춤이 살풋 내려앉았다. 때마침 들러리가 뿌려줬을 꽃가루 대신 정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흩날렸고 식장 문이 벌컥 열렸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두 사람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던 거였다. 알록달록한 두건을 쓴 무리는 참 바글바글하게도 몰려들었다.
“아아―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줄 하객들이 이리도 많이 찾아와주다니. 정말 고맙네.”
너는 피식 웃으며 성검을 길게 뽑아낼 준비를, 나는 부케를 쥐고 남은 한 손으로 사심검을 불러들일 준비를 했다. 그동안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겨우 하나로 이은 시선을 끊어내기 아쉬워서 곁눈으로만 적을 대강 파악했다.
“그럼, 다음으로 결혼하고 싶은 사람?”
그래도 맡은 일은 해야지.
누가 먼저 꺼냈는지 모를 혼잣말로 서로를 타이르자마자 부케는 리본을 휘날리며 저 높이 붕 날아올랐고 우리는 각자 검을 든 채 하객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결혼식은 끝났지만 이제 피로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