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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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류세이는 이를 갈면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메테오 드라이버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두들겨 맞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온몸이 아팠지만, 상관없었다. 류세이의 눈은 자신에게 향하지 않았다. 메테오 드라이버보다 더 먼 곳에 있는 한 사람,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향했다.
“토모코…….”
류세이는 울분에 찬 목소리를 토해내며 토모코의 이름을 불렀다. 신성하고 아름다워야 할, 아니 그랬던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하객들은 모두 도망쳤고, 신부는 적에게 붙잡혔다. 분명히 계획은 단 하나, 메테오로 변신해서 식장을 급습한 조디아츠를 없애고 토모코는 구해내는 것일 터였다.
하지만 적은 류세이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포제인 겐타로의 벨트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마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적이 바로 반바 카게토의 수하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적은 라이더부의 전력과 결혼식에 온 인원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면서 조디아츠의 전신을 수놓은 별자리를 노려보았다. 우주비행사인 유우키라면 보자마자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류세이는 그것이 어떤 별자리인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긴박한 상황에서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본인이 직접 부츠 조디아츠, 목동자리의 조디아츠라고 말했기에, 류세이가 조디아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토모코를 풀어줘!”
류세이는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자신과 토모코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울타리를 부수고 메테오 드라이버를 집어 변신할 수 있었다. 스위치는 마침 턱시도 외투 주머니에 있었다. 하지만 변신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토모코가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어서 꺼내지 못했다. 류세이는 감히 토모코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걸 수 없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바 카게토의 수하라고 한다면, 역시 목적은 돈이랑 초능력 병사의 양산인가. 하지만 자금을 대줄 아쿠마이저는 이제 없을 텐데.’
게다가 반바 카게토 일당은 모조리 인터폴에서 조사했다. 감히 친구를 건드리려던 것이 괘씸해서 말단의 말단까지 전부 이 잡듯이 털었는데, 리스트에서 빠진 공범이 있을 줄이야. 류세이는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지팡이를 든 조디아츠는 류세이를 바라보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조디아츠가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손짓을 하자 조디아츠가 불러낸 들개 형상의 소환체가 류세이의 뒷덜미를 들어 올렸다.
“상황 파악이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그런 걸 할 여유가 있나 보지?”
“말했잖아! 토모코는 풀어달라고! 복수하려면 나한테 해!!”
“복수? 내가? 웃기는군. 반바 카게토가, 내가 복수를 할 만큼 가치 있는 인간으로 보이나?”
“뭐……?”
“난 그저 내 사업에 방해가 되는 잡초를 미리 제거하려는 것뿐이야. 그 인간의 패착이 가면라이더라면, 당연히 제거해야지.”
제거. 류세이는 그 단어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드니 토모코가 울먹이며 류세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류세이, 선배.”
파란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을 받고 반짝였다. 티아라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는 서늘하고 차갑기만 했다. 티아라 밑에는 베일이 있었다. 검은 장막처럼 길게 드리운 베일이 토모코의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모두 가면라이더부 명예회장이자 유명 모델인 미우가 고심해서 추천해준 것이었는데 토모코를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토모코에게 아주 잘 어울리는 블랙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류세이는 지구보다 무거운 중력이 지배하는 행성에 서 있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토모코의 머리 위에 놓인 티아라는 절벽에 매달린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보였고, 긴 베일과 드레스는 토모코가 도망치는 데 방해만 될 뿐이었다. 류세이는 모든 게 제 탓이라는 생각에 발목을 붙잡혔다. 한 번 발목을 잡은 생각은 류세이의 사고를 서서히 마비시켰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고는 했지만, 좀 더 철저하게 해야 했다. 류세이는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가는 무력감과 절망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는 숨죽여 울고 있는 토모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힘겹게 미소지었다.
“나는 괜찮아, 토모코. 걱정하지 마.”
“……눈물겹군. 좋은 걸 하나 보여줄까.”
부츠는 파란색의 패치를 자신의 목덜미에 붙였다. 반바 카게토가 일전에 아쿠마이저의 도움을 받아 양산한, 평범한 인간을 초능력 병사로 만드는 패치와 비슷한 형태였으나, 뭔가가 달랐다. 조디아츠는 숨을 들이쉬더니 서서히 기합을 내뱉기 시작했다. 공중에 반짝이는 먼지 같은 것이 일렁이더니 닌자처럼 생긴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더스타드?!”
더스타드는 호로스콥스만이 소환할 수 있는 코즈믹 에너지 덩어리였다. 호로스콥스도 아닌 일반 조디아츠가 소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설령 라스트 원 상태에 도달한 조디아츠라도 더스타드를 소환할 힘은 없었다. 류세이는 침을 삼키고 더스타드의 수를 셌다. 수는 다섯이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맨몸 상태로도 얼마든지 제압은 가능했으나 역시 문제는 토모코의 안위였다. 상황은 전보다 복잡해졌다. 그리고 토모코를 구하기 위해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은 그보다 더 복잡해졌다. 제일 안전한 선택은 무기를 가지러 간 가면라이더부나, 도움을 요청하러 간 잉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시간을 끌기도 전에 두 사람 다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일은 항상 생각대로 흐르지 않는 법이었고, 적이 그때까지 기다려주리라는 법도 없었다. 공들여 세운 탑을 무너뜨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면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류세이는 눈을 내리깔았다. 부츠의 목덜미에 붙여진 패치가 만약 코즈믹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장치라면, 부츠를 이루는 코즈믹 에너지는 굉장히 불안할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승산은 있었다. 토모코를 우선 안전한 장소로 대피시키고, 부츠 조디아츠에게 지더라도 부원들과 잉가가 올 때까지 버텨야 했다. 변수는 물론 있었다. 그러나 변수를 두려워하기에는 상황과 시간이 너무도 촉박했다. 류세이는 자신이 잘못될 최악의 가능성까지 계산한 뒤, 마음을 다잡았다. 류세이는 토모코의 목숨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도박판에 올려놓기로 했다.
달려든다. 변신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주의를 끈 다음에 토모코를 구한다.
“호……. ……와다!”
울타리 바로 앞에 다다른 류세이는 주먹을 들어, 울타리 위에 생성된 결계를 부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울타리가 사라졌다.
“헤, 의외로 간단히 깨지네.”
류세이는 몸을 돌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들개 소환체를 향해 반대편 주먹을 날렸다. 류세이의 기합 소리와 함께 소환체는 나동그라졌다. 부츠는 류세이의 행동에 조금 놀란 듯한 신음을 흘렸다. 류세이가 설마하니 무모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울타리를 넘을 각오를 했으면, 당연히 응징당할 각오도 했겠지.”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각오는 한 기억이 없는데. 너야말로 남의 울타리에 함부로 들어온 각오를…….”
류세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츠가 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 끝부분에서 초록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빛은 류세이의 몸에서도 흘러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빛을 응시하던 류세이는 돌연 온몸에 가시라도 박힌 듯 괴로워하며 쓰러졌다. 거친 숨이 입에서 새어 나왔다. 눈앞이 핑 도는 것만 같았다.
“말했잖아. 각오하라고. 어때? 네가 뽑아낸 말뚝에 박힌 기분은.”
“류세이 선배!”
“나, 나, 나는 괜찮아, 토모, 코.”
류세이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일어서려고 땅을 짚었다. 부츠는 류세이를 신경을 쓰려고도 하지 않고 토모코를 향해 더스타드를 움직이고 있었다. 류세이는 메테오 드라이버를 집으러 움직였다. 선명한 통증에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통증은 커져만 갔다. 몇 발만 더 가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발이 천 걸음인 것처럼 느껴졌다. 온 세상이 팽창해서 멀어지는 우주처럼 류세이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류세이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토모코가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더스타드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눈빛은 더스타드 너머에 있는 부츠 조디아츠와 류세이에게 동시에 향하고 있었다. 류세이는 침을 삼켰다. 주위의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는 빛이 들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둠이 모여든 토모코의 눈동자에 류세이는 사로잡혔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류세이는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그사이 사납게 눈을 치뜬 토모코의 모습이 더스타드에 의해 사라졌다.
* * *
류세이는 입가를 주먹으로 닦아냈다. 입술이 쓰라렸다. 류세이를 둘러싼 양아치들은 손바닥으로 반대편 주먹을 꽉 쥐면서 류세이를 위협했다. 비겁한 놈들. 류세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할 수 없어서 상대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상대가 몇이든 류세이는 이길 자신이 없었다. 실제로 주먹다짐을 해본 바로, 그들은 주먹을 휘두를 줄만 아는 주제에 머릿수만 믿고 나대는 애송이들이었다. 평소라면 그런 애송이들에게 한 대라도 맞았다는 것만으로 자존심이 상해 치를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류세이는 비틀거리면서 양아치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토모코를 바라봤다. 다행히 손찌검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다행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들이 토모코를 위협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류, 류세이 선배!”
“그러게 그냥 갈 길 가면 되지. 왜 사서 고생을 하셔, 그래? 쟤 남자친구라도 돼?”
“그런 거 아니야! 류세이 선배는 그냥…….”
류세이는 고개를 저었다. 류세이가 한 고갯짓의 뜻을 이해한 듯 토모코가 침묵했다. 그들의 주의가 자신에게 쏠린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양아치에게 시비가 걸린 토모코를 발견해서 망정이었지, 다른 길로 갔거나 같은 길로 갔어도 못 보고 스쳐 지나갔다면. 상상한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흘렀다.
“아가씨, 그쪽한테 물은 거 아니거든?”
“토모코 건들지 마!”
양아치 중 한 명이 토모코의 어깨에 손을 얹자, 류세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양아치들은 류세이의 외침에 코웃음을 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류세이를 주먹을 쥐며 세게 달려들었지만, 달려들려는 순간 변한 분위기에 멈춰 섰다. 토모코는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양아치의 손을 세게 붙잡았다. 언뜻 보기에도, 그리고 실제로도 토모코의 악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류세이는 토모코의 그 손놀림이 마치 양아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손을 우그러뜨리기 위한 손놀림이라고 생각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지금? 얘 좀 봐라. 은근히 맹랑한 구석이 있네?”
“…….”
류세이는 침을 삼켰다. 양아치는 이죽거리면서 토모코를 내려다 봤고, 토모코는 그런 양아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모코의 옆얼굴에서 류세이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토모코가 무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류세이가 아는 토모코는 싸움을 하지 못했다. 의외로 몸놀림이 재빠르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그러나 류세이는 토모코가 그 양아치를 어떻게 할 것만 같았고, 마치 그 양아치가 다치는 게 두려운 사람처럼 떨었다. 류세이는 허공에 반쯤 올라간 오른쪽 주먹을 왼손으로 잡고 내렸다.
토모코의 눈동자는 검었다. 아니 토모코의 눈동자는 원래부터 검었다. 그랬는데. 지금 토모코의 눈은 연필로 그린 원을 몇 번이고 그어 검게 만든 것처럼 시커멓기만 했다. 토모코의 눈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우주 공간의 다수를 차지하는 어둠에 비유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어두웠다. 토모코의 눈빛에는 다정함도, 자비도, 그 무엇도 없었다.
류세이는 일전에 제이크가 혀를 내두르면서 래빗 해치에 도망 왔을 때를 떠올렸다. 같은 반 아이가 다른 아이를 심하게 괴롭히는 것을 보고 토모코가 심하게 화를 냈다고 했다. 류세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왜 제이크에게 그냥 도망친 거 아니냐고 물었다. 제이크는 억울한 얼굴로 아니라고 했다.
“토모가 화내는 걸 못 보셔서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장정 열 명이 와도 토모가 화내면 다 끝이니까요.”
“내가 화내는 걸 왜 못 봐. 전에 분명히…….”
“류세이 선배가 배신한 일 말씀이시죠? 그건 화낸 것도 아니에요. 그땐 토모도 저희도 화가 나긴 했지만, 그것보다 속상한 마음이 더 컸을걸요?”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류세이는 뜨끔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배신자의 길을 택했을 때, 모두가 류세이에게 한 마디씩 내던졌지만 유독 토모코의 말만은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토모코가 옳고, 자신은 틀렸기에 토모코의 말은 류세이의 마음속에서 비수가 되었다. 그러나 제이크는 그때 토모코가 내비친 반응은 오늘 보인 분노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고 했다. 류세이는 그것이 제이크의 호들갑이라고 생각했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류세이는 그제야 제이크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양아치도 토모코의 기세에 눌리기 시작한 건지 토모코와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 역시 류세이에게서 토모코로 옮겨갔다. 그들은 토모코에게 겁먹은 제 동료를 비웃고 있었다. 안돼. 류세이는 급히 돌이라도 주워 그들 중 한 명에게 던지려고 했지만, 돌을 들자마자 토모코가 입을 열었고 류세이는 양아치들과 같이 멈칫했다.
“……이럴 시간이 없을 텐데. 얼른 돌아가야 할걸?”
“……뭐?”
“너희 있는 곳, 집은 아니지만, 거기, 불 켜진 드럼통, 있지 않아?”
토모코는 탁한 눈동자로 더듬거리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양아치들은 일제히 토모코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류세이만이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리지 않고 토모코의 손가락 끝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야, 우리, 드럼통.”
“뭐.”
“거기 바로 옆에…… 휘발유 섞은 거 놔두지 않았어?”
“아. ……뭐?! 네가 마지막으로 나왔잖아! 그걸 왜 거기다가 놔!”
“아니. 네가 다녀오면 바로 팔러 갈 거라며!”
휘발유랑 다른 걸 섞어서 가짜휘발유라도 팔아먹으려고 한 건가? 류세이는 숨을 죽이며 머리를 굴렸다. 토모코의 손가락은 여전히 한 구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류세이는 그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란스러운 도중에도 양아치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에게 책임을 돌렸다. 류세이는 토모코가 잔잔한 물결에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돌을 던지는 것만으로 호수에 파장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파도를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토모코는 보란 듯이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지속적이고 아주 큰 파도를.
“아니, 잠깐만. 그전에 저 녀석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류세이는 그 말에 손안에 든 돌을 세게 쥐었다. 여차하면 돌을 던지고 토모코를 데리고 도망갈 작정이었다. 양아치 중에 육상선수급 달리기 실력이 있는 녀석이 있을지도 몰랐고, 토모코가 달리다가 넘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따지는 것보다 우선 저 녀석들을 토모코에게서 떼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더 미룰 수 없었고, 저들을 떼어낼 방안도 여러 가지 있었다. 류세이에게도 누구 못지않게 빨리 달릴 자신이 있었고, 토모코가 달리다가 지칠 거 같으면 다소 거칠고 무례한 방식이지만 토모코를 안아 들고 가는 방법도 있었다.
하나, 둘, 셋. 하고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던 류세이는 토모코의 평온한 눈동자를 보고 돌을 내려놨다. 그러지 말라는 목소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잔잔하게 울리는 것만 같았다. 불안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류세이는 안심했다. 류세이를 응시하던 토모코가 입을 뗐다.
“지금 안 가면 다 탈걸? 거기 당신, 어제 ATM기에서 돈 뽑았잖아?”
토모코가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남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남자가 움찔거렸다. 마침 옆 거리에서 소방차가 내는 것으로 보이는 사이렌이 들렸다. 양아치들은 불안한 시선을 나누더니 손짓으로 빠지자고 했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주저앉은 건 토모코가 아니라 류세이였다. 류세이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토모코는 천천히 다가와 류세이의 등을 쓸어내려 줬다.
“류세이 선배, 다친 곳은 괜찮아요?”
“괜찮아. 그것보다…….”
류세이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토모코를 바라봤다. 토모코는 류세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낮고 음침한 웃음소리였다. 토모코는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가방에서 연고를 꺼내 터진 입술에 발라주었다. 터진 줄도 모르고 있던 류세이는 연고가 닿자 몸을 움질거렸다. 토모코는 연고를 꼼꼼히 발라주더니 됐다, 하고 중얼거렸다.
“토모코는 다친 곳 없어?”
“없어요. 조금 놀라긴 했는데, 그거 말곤 괜찮아요. ……감사해요. 구해주셔서.”
“뭘. 무사해서 다행이야, 토모코.”
옷을 털고 일어나니, 문득 의아해졌다. 토모코가 양아치들을 알던 눈치는 아니었고, 미리 조사했을 리도 없었다. 사는 곳을 안다고 해도 세세한 것까지는 알 길이 없었다. 마녀라서 아는 걸까? 류세이의 생각을 읽은 건지 토모코가 다시 웃기 시작했다.
“후후, 과연 그럴까요?”
“내, 내 생각 읽었어?”
“방금 ‘마녀라서 녀석들의 본거지 상황을 안 건가?’…… 그런 생각 하신 거 아니에요?”
류세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면 거짓말이라고 간파당할 것이고, 토모코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였다. 류세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토모코는 대수롭지 않게 감이라고 답했다. 그렇겠지. 늘 그렇게 대답했으니까. 류세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토모코는 그 생각도 읽고 있겠지만, 류세이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상관이 있었다면 토모코는 바로 저주를 내렸을 테니까.
“……흠흠. 그래서 저 녀석들 아지트, 정말 다 타는 거야?”
“글쎄요? 다 타지는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요?”
“그것도 토모코, 네가 한 거야……?”
그 말에 토모코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기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다는 반응에 류세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민하던 토모코가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토모코 네가 개입한 건…… 여하간 맞는다는 거네?”
“네. 맞아요.”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토모코에게 특별한 힘이 있다는 건 알았다. 토모코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이른바 영감(靈感) 소녀였다. 하지만 영적 감각이 열려있는 것과 별개로, 토모코가 마법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토모코는 다른 사람이 엿듣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더니 소곤소곤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요.”
“응.”
“……저희 마녀에게는 영감이나 저주 말고도 각자 재주가 하나씩 있어요.”
재주? 류세이가 되뇌었다. 재주라기보다, 능력 아닌가? 그중에서도 초능력 같은 것 말이다. 류세이는 딴지를 걸려다가 말았다. 토모코는 말을 이었다. 자신에게는 ‘운명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응? 운명이라고 했어?”
“네. 뭐, 움직인다고 해봤자 거창한 건 아니에요. 예정된 일이나 가능성을 조금 앞당기는 거랄까요? 그 사람들, 부주의한 성격 때문에 언젠가는 일을 칠 운명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아주 살짝, 재주를 부렸는데…… 먹힐 줄은 몰랐어요. 오랜만에 해본 건데 다행이에요. 류세이 선배를 도울 수 있어서.”
토모코는 수줍게 웃었다. 아, 또 그 미소다. 류세이는 잠시 넋을 놓고 미소짓는 토모코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가슴께가 뻐근했다. 그뿐인가?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어디를 잘못 얻어맞아서 생긴 문제는 아니었다. 류세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래도 진정되지 않아서 류세이는 고개를 들어 여름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은 바다처럼 깊고 푸르렀다.
그때 하늘을 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류세이는 그 후에도 이따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하늘에 토모코를 향한 마음을 묻어두고 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늘을 볼 때마다 토모코가 떠오르게 된 것도, 토모코 생각이 항상 머리 위에 있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에는 우연이 아닌 운명이 되었다. 그리고 류세이는 그 생각에 덧붙여 다른 가능성도 상상하게 되었다.
토모코가 본인에게 운명을 움직이는 재주가 있다는 고백을 했을 때, 자신의 운명도 움직인 것은 아닌지 말이다. 류세이는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아무렴 좋을 일들이 세상에는 수없이 있었다. 게다가 토모코에게 답을 듣지 않아도, 류세이는 이미 토모코가 자신의 운명을 정해놓았다고 여겼다. 류세이의 그런 고집은 꽤 오래 이어져서, 마침내는 불변의 진리로 굳어졌다.
* * *
왜 갑자기 그런 게 생각났을까. 토모코가 양아치들 가운데서 위험했을 때, 오히려 도움만 받았던 일. 그 밖에도 토모코 무릎에 누워서 손을 마주 잡았던 일이나, 밥을 먹다가 뜬금없이 올해가 가기 전에 결혼하고 싶은데, 하고 넌지시 말한 일. 류세이는 억지로 버티고 서서 자신의 발 앞에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바라봤다. 전부 소중한 것이라 잊을 수 없는 기억뿐이었다.
“토모, 코…….”
온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토모코의 이름을 부르자 움직일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류세이는 주먹을 치켜들고, 부츠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토모코를 포위하던 더스타드가 연달아 쓰러졌다. 류세이는 멈칫했고, 곧 주먹을 앞으로 뻗으며 숨을 몰아쉬고 있는 토모코와 눈이 마주쳤다. 류세이를 바라보던 토모코는 그대로 부츠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은 내가 위험하면 류세이 선배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토모코는 울먹이면서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꼭 잡았다. 이윽고 왼손을 왼쪽으로 옮기더니, 그대로 치맛자락을 찢었다. 부츠 역시 류세이와 마찬가지로 토모코의 행동에 당황한 건지 멈칫했다. 티아라와 베일이, 구두가 토모코에게서 차례대로 떨어져 나왔다. 토모코는 베일을 고정하기 위해 꽂았던 핀과 올림머리를 감싼 머리망도 뺐다. 폭포수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린 부츠가 더스타드에게 토모코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지만, 토모코는 아무렇지 않게 더스타드에게 주먹을 날렸다. 다음으로 들어오는 공격은 물 흐르듯이 피했다. 근접전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더스타드가 이번에는 표창을 날렸다. 토모코는 결혼식장의 기둥을 엄폐물로 삼더니, 표창이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사라지자 그대로 구르며 허벅지에 장착해두었던 단검을 던졌다. 더스타드는 단검을 맞고 쓰러졌다. 토모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 더스타드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있는 더스타드에게서 단검 두 개를 뽑아 양손에 하나씩 쥐었다.
부츠 조디아츠는 지팡이를 다시 땅에 내리쳤다. 토모코와 부츠 사이가 울타리로 가로막혔다. 류세이는 몸을 움직이다가 멈칫했다. 토모코는 더스타드의 공격을 피하거나 단검을 휘둘러 쳐내면서 말했다.
“……한때 반바 카게토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겠죠. 하지만 당신이 틀렸어. 당신은 우리를 이기지 못해.”
류세이는 부츠가 아닌 토모코를 바라봤다. 모든 속박을 벗어던진 흑조처럼 토모코는 전투를 이어갔다. 그 누구도 토모코를 공격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토모코의 앞길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류세이는 불안감을 지우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토모코의 호흡이 점점 흐트러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토모코 또한 그걸 아는지, 울타리 너머에 있는 류세이에게 눈길을 줬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바라는 것 같은 눈빛을 응시하던 류세이는 그제야 토모코가 뭘 바라는지 알아차렸다. 부츠는 류세이와 토모코가 시선을 교환하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모코가 자신에게 내뱉는 말에만 반응했다. 고개를 돌린 부츠가 지팡이를 들었다. 류세이는 질겁해서 토모코를 바라봤지만, 토모코는 기둥 뒤에─류세이가 토모코의 옆얼굴을 볼 수 있는 각도였다.─ 숨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자신이 아니란 의미였다.
류세이는 그 사인을 읽자마자 몸을 바짝 숙였다. 거의 바닥에 엎드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팡이는 류세이의 머리 바로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류세이는 그대로 왼발로 땅을 박치고 몸을 날렸다. 부츠 바로 앞에 있는 메테오 드라이버를 집고, 오른발로 한 번 더 땅을 박찼다. 부츠는 당황한 듯 휘두른 지팡이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지 못했고, 류세이는 땅을 박차서 얻은 추진력을 이용해 부츠의 목덜미에 붙여진 패치를 떼어냈다. 부츠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류세이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류세이는 공격을 받고 옆으로 구르다가 겨우 자세를 잡았다.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류세이 선배, 괜찮으세요?”
더스타드가 사라지자 토모코가 울타리 가까이 다가와 결계 위에 손을 댔다. 류세이는 그 위에 손을 겹쳤다. 하지만 토모코의 체온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리창에 손을 댄 것처럼 차갑기만 했다. 류세이는 괜찮다고 토모코에게 속삭이고는, 드라이버를 착용했다.
“나도 처음에는 몰랐는데 말이야. 토모코가 알려줬거든. 네가 만들 수 있는 울타리는 딱 하나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너도 이 울타리를 부수면 불이익을 받는 모양이더라?”
“그걸, 어떻게.”
“토모코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눈빛만 보면 알거든. 명색이 남편인데, 그 정도는 눈치껏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안 그래?”
Meteor Storm. Meteor on, Ready? 드라이버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고, 류세이는 양팔을 크게 돌려 원을 만들었다. 토모코는 울타리에서 몇 발자국 물러나,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토모코를 뒤돌아보고 슬쩍 미소지은 류세이가 다시 부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변신.”
결혼식장은 고요하게 불타고 있었다. 붉은 불길이 바람과 함께 류세이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메테오 스테이츠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었다. 메테오 스톰 스테이츠 정도가 적절했다. 류세이는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고 토모코를 건드리려고 했던 혐의까지 모두 포함해, 적을 문자 그대로 ‘조져버릴’ 생각이었다.
* * *
결과만 놓고 이야기하면, 류세이는 조디아츠를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비록 리밋 브레이크를 한 직후에 잉가와 동료들, 그리고 가면라이더부 부원들이 뛰어 들어와서 한 대─사실 때릴 시간이 있었더라도 토모코가 말렸을 것이고, 류세이도 마음만 그랬지 진짜 화풀이로 때릴 생각은 없었다.─때려주지는 못했지만, 토모코가 대신 상대를 저주하는 주문을 읊어주어서 류세이는 화를 삭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어쩌지……. 우리가 비용 물어줘야 할 텐데…….”
류세이는 구급차를 기다리면서 토모코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식장에서 빠져 나와 아무 의자에나 앉았는데, 의자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대서 하는 수 없이 토모코를 무릎 위에 앉혔다. 토모코는 류세이의 무릎 위에 비스듬히 앉아서 류세이를 올려다 봤다.
“괜찮아요. 저 돈 많아요.”
그러면서 토모코는 아무렇지 않게 류세이의 품에 폭 안겼다. 류세이는 순간 여자친구, 아니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느껴졌다. 아니지. 토모코는 원래 멋지지. 류세이는 생각을 조금 고쳤다. 하지만 토모코가 열심히 글을 써서 번 돈을, 이런 곳에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 류세이는 범인이 배상하도록 하는 법적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손등 까진 것 좀 봐…….”
장갑을 벗은 토모코의 손을 살펴보던 류세이가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고 있는 스타킹 올도 나갔고, 그 안으로 비치는 맨살에도 흉이 져 있었다. 역시 한 대 때렸어야 했다. 아니 한 대가 아니라 기절하기 직전까지는 때려줬어야 속이 후련해질 텐데. 얼굴을 잔뜩 찌푸린 류세이의 생각을 읽은 건지 토모코는 손을 들어 류세이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야야……. 토모코, 갑자기 왜 그래애…….”
“류세이 선배가 저보다 더 다쳤으면서. 전 아무렇지 않아요. 이 정도 상처는 일상에서도 생기는 상처인걸요. 그러니까 이따 구급차 오면, 간단한 처치만 받을 생각일랑 하지 마시고 입원하셔야 해요. 신혼여행은 미루면 되니까요. 알겠죠?”
토모코가 짐짓 엄한 투로 말했다. 류세이는 힘없이 알았다고 했다. 신혼여행까지 망치고 싶지 않아서, 큰 상처만 적당히 치료받으려고 했는데 토모코는 역시나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뵀다. 내가 누굴 속여. 차라리 사기꾼을 속이는 게 낫지……. 류세이는 한숨을 푹 쉬다가 이내 멀뚱거렸다. 토모코가 싸울 때 사용한 건 분명 류세이도 사용하는 권법인 ‘성심대륜권’이었다. 일전에 토모코에게 가르쳐준 적이 있었지만, 호신술 용으로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준 게 다였다. 딱 한 명, 토모코에게 성심대륜권을 제대로 가르쳐줄 만한 사람으로 짚이는 인물이 있었다.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아요.”
류세이는 입을 떡하니 벌렸다. 류세이의 친우인 이세키 지로. 지로는 도장 동문이자 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거의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였는데 류세이에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덕분에 토모코가 크게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지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던 류세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손을 내렸다.
“설마 합기도도?”
“네. 그건 란이 가르쳐줬어요.”
“그, 그럼 단검술은?”
“음. 그건 잉가 씨가 가르쳐주셨어요.”
“킥복싱은…… 우츠기 선생님이?”
토모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수의 경지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공격 의사가 있는 적과 싸운 것만으로도 실력은 어느 정도 있다는 뜻이었다. 모르는 새에 아내의 전투력이 늘었다. 류세이는 아득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 봤지만,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내렸다.
“……역시 내가 믿음직하지 못해서…….”
“또 이상한 생각 하신다. 류세이 선배는 전부터 제 영웅이었다니까요. 다만 저는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저 역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걸요.”
토모코는 류세이의 손을 잡아 들어 그대로 깍지를 꼈다. 상처 입은 두 손이 합쳐지며 견고한 매듭이 되었다. 자, 봐요. 토모코가 운을 뗐다.
“이러면 어려운 일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죠?”
“……응. 그렇네.”
“일부러 말 안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최대한 아무 일이 없었으면 해서 말을 안 한 거예요. 류세이 선배가 방금 하신 거랑 같은 생각을 하실 거 같아서요. 그런데 싸워 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류세이 선배가 지금까지 혼자 힘드셨겠구나.’ 하고요.”
“그렇게까지 힘든 건 아니었는데…….”
류세이는 머쓱하게 웃었다. 토모코는 그러면서 드레스 안에 단검을 숨기고 있었던 것도 만약을 대비한 조치라고 했다. 하긴 하객들이 입장하기 전에 미리 흉기 소지 여부를 다 검사해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안심했다. 류세이는 고개를 숙여 토모코와 이마를 맞댔다.
“토모코. 이제 알겠어. 우리는 둘이서 하나인 거지?”
“맞아요. 우린 부부니까요.”
“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해줘서 고마워, 토모코.”
“저도 감사해요. 앞으로도 저와 함께하겠다고 해주셔서.”
“사랑해.”
“저도요.”
류세이와 토모코, 두 사람 모두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턱시도든 드레스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찢어져서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토모코의 볼에 입맞춤하려던 류세이는 잉가가 다가와 구급차가 왔다고 말해주자, 괜히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주변에서 대기하던 경찰이 준 슬리퍼를 토모코에게 신겨주었다.
결혼식장이 사건 현장을 수습하려는 사람들로 분주한 가운데,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구급차로 향했다. 다친 곳은 조금 아팠지만 두 사람이 얻은 것에 비하면 이 정도의 상처는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은 수고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