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랑은 형태가 없다
본편 날조, 스포일러, 가스라이팅 요소 有
카가미 히이로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으니 나와달라는 전화 한 통에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고 게이머 드라이버도 챙기지 않은 채 인적이 드문 공터에서 그와 만났던 날을.
평소처럼 정장을 입은 그는 며칠 전 데이트에서 함께 샀던 키링이 달린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평소처럼 웃고 있었지만, 히이로는 본능적으로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정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벨트, 게이머 드라이버를 하고 있었으니까.
―안녕, 히이로 군.
옅게 하늘을 덮은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쳤다. 찬란하게 비산하는 빛 아래에 선 그는 즐겁다는 기색이 완연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히이로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생각보다 빨리 와서 놀랐어. 그래도 설마하니 그런 차림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타박하는 모습이 낯설어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추 한두 개를 꿰지 않고 넥타이도 걸치기만 한 제 모습을 훑는 시선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며칠 전에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손을 맞잡고 밀어를 속삭이던 이가 저기에 선 남자가 맞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게이머 드라이버는 한낱 개발자에 지나지 않는 이가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CR의 가면라이더는 4명이었고 게이머 드라이버의 개수도 4개가 전부일 테니까. 그럼 저건 뭐란 말인가.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해할 수 없는, 또 단박에 인지한 사실에 혼란스러워 꼼짝도 하지 못하는 히이로를 빤히 보던 그가 가벼이 말을 덧붙였다. 혼잣말에 가까웠으나 히이로는 그가 일부러 저 말을 흘렸으리라 확신했다. 정말로 그는 자신의 옷차림이나 반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건 그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꿰뚫릴 것 같은 시선을 느끼며 히이로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쿠로토 씨.
한참이나 머뭇대다가 할 말이라곤 이름을 부르는 게 고작이었다. 단어 하나를 뱉기 위해 바짝 마른 입안을 연신 혀로 닦아내고 마른침을 삼키고, 그 결과가 저거였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는 듯 흥미로워하는 얼굴에 한껏 짓눌린 말.
―응, 히이로 군.
그런 형편없는 물음에도 단 쿠로토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동시에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보랏빛 가샤트를 꺼냈다. 프로토 마이티 액션 X, 검은 에그제이드의 가샤트였다. 히이로는 피가 비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겨우 눈을 돌리려 했던 현실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므로.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하고 있어.
한 손에는 커플 아이템이라고 샀던 키링이 달린 핸드폰을, 다른 손으로는 가샤트를 쥔 쿠로토는 뱀처럼 속살댔다. 기동 스위치를 눌러 게임 에리어를 전개한 그는 천천히 손가락에 끼운 가샤트를 빙글 돌렸다. 여러 감정이 혼재하며 요동치는 시선을 따라 그대로 내리긋는 손길에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Gashat!
쿠로토는 유려하게 선을 그리듯 슬롯에 삽입하고 레버를 당겼다. 화려하게 깔리는 기믹음을 배경으로 서서히 짙은 보랏빛 데이터에 휘감기는 그를 보며 히이로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적’을 앞에 둔 가면라이더로서 저 역시 변신하기 위해.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걸쳐 입은 옷 주머니는 텅 비어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히이로 군.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뭐 하자는, 겁니까.
색이 반전된 가면라이더는 팔을 뻗어도 제 옷자락을 스치지 못할 테지만 히이로는 그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는 이형의 손에 목이 잡혀 꽉 눌린 목소리가 기괴했다. 짧은 침묵이 히이로와 보랏빛 가면라이더―겐무 사이를 가로질렀다. 숨 막히는 고요함의 끝에 겐무는 느리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변신한 후에도 그는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정확하게 키링을 보여주는 행동일 것이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도 되지 않는 것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양새가 꼭 ‘카가미 히이로’를 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잖아? 히이로 군에게는 감추는 게 없어야 할 것 같아서.
―……왜? 왜 하필.
단숨에 열이 올라 눈가가 뜨끈뜨끈했다. 벌겋게 달아올라 바싹 타버린 눈이 따끔거렸다. 날카로운 날로 뱃속이 휘저어지는 것 같다. 밀려오는 욕지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좋을 텐데. 마구잡이로 날뛰는 감정 사이로 싸늘하게 식은 이성이 몸을 들이밀었다.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히이로는 붉게 충혈된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말 그대로였다. 의사는 어떤 돌발상황에서도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했다. 몸에 밴 직업의식은 이런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이?
―당신이 날 배신했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당신을 베겠다는 이야기다.
배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으로도 목구멍 너머로 쓴 물이 올라왔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 그가 자신을 속이고 거짓을 말했을 거라는 건. 가샤트도 게이머 드라이버도 없었으나 카가미 히이로, 가면라이더 브레이브는 나직하게 자신의 사랑에 종언을 고했다.
―내가 히이로 군을 배신했다, 라. 그렇게 받아들일 줄 몰랐는데.
―그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까. 사실 당신은 버그스터와 한 패인 가면라이더고 그걸 숨긴 채로 나랑 사귀었던 행위가 배신이 아니라고 말할 셈입니까?
겐무는 잠시 답이 없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하는 건가.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악을 쓴 탓인지 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가쁘게 차오른 숨을 내쉬는 히이로를 보던 겐무는 매만지고 있던 키링을 억지로 핸드폰에서 잡아 뜯었다. 약한 재질이었는지 아니면 가면라이더의 힘이 강했던 건지 키링이 엉망으로 찌그러졌다.
―히이로 군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건 이제 필요 없는 물건이네.
Gashoon!
가면 너머로 들린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무덤덤했다. 실망했다거나 분노했다거나, 히이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부서진 키링을 무심한 손길로 바닥에 내던진 겐무, 단 쿠로토는 가샤트를 빼내어 변신을 해제했다. 흩어지는 데이터 사이로 보인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었다.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네. 난 히이로 군이 그런 표정을 할 줄 몰랐어.
가늘게 뜬 눈동자에 의아하다는 감정이 들어찼다. 구름이 햇빛을 가리자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새 불투명해진 시야에 비친 그의 눈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으로 일렁거렸다.
―내가, 무슨 표정을 했다고.
카가미 히이로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으리라. 눈꺼풀을 축축하게 적시다 서로 뭉쳐 톡 떨어진 눈물에 반사된 그의 얼굴에 만연하게 퍼지던 희열을.
“그래도 상관없어. 난 그 누구보다도 히이로 군을 사랑하니까.”
둥글게 휜 눈이며 곱게 호선을 그린 입술에 찐득하게 눌어붙은 광기는 독과 다를 바 없어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에게 배신감을 느끼건 분노하건 이미 독은 내부까지 스며들어 빠져나갈 수 없겠지. 자신이 담았던 사랑의 편린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으며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카가미 히이로는 숨죽여 울었다. 갈 곳을 잃고서 방황할 제 마음의 행방을 추모하며.
* * *
카가미 히이로는 단 한 번도 그가 죽을 수 있다는 가정을 해보지 않았다는 걸 불길한 보랏빛을 띤 라이더 게이지가 0을 가리키고 난 후에야 깨달았다. 게이머 드라이버는 사용자의 생명이 위험할 경우 저절로 변신을 해제하는 기능이 탑재되어있다. 개발자인 단 쿠로토가 그 점을 모를 리 없을 터다. 그래서 가면라이더 브레이브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라이더 게이지가 바닥을 보이는 상황에서 뻔히 에그제이드가 맞받아칠 거라는 걸 알면서 무리하게 공격해 일부러 라이더 게이지를 0으로 만드는 겐무의 행동을. 그를 만나고 마음을 내주고 반쪽짜리 사랑으로 끝나버리는 순간까지 카가미 히이로는 단 쿠로토라는 인물을 전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만큼 그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당신, 라이더 게이지가.”
무어가 그리 신나는지 에그제이드와 함께 겐무를 몰아붙이던 레이저의 슈트 아래로 당황스러움이 묻어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쿠죠 키리야는 이 중 유일하게―히이로를 제외한―겐무의 정체가 쿠로토라는 걸 확신한 사람이었다. 쿠로토가 먼저 밝혔을 리 없다. 히이로와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제 정체를 숨겼을 인물이었으니. 스스로 알아낸 건가.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을 시체에서 사인을 알아내는 감찰의다운 통찰력이었다.
“왜 게임 오버 되지 않는 거지?”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도 꽤 침착하게 운을 뗀 건 가면라이더 스나이프였다. 그는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라도 하듯 가샤콘 매그넘을 겐무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내가 알 턱이 있나.”
최대한 다른 이가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은 히이로는 가샤콘 소드를 내리며 짧게 대꾸했다. 그건 자신도 알고 싶은 부분이었다. 게임이 모티프가 된 탓에 라이프 게이지가 떨어지면 사용자가 실제로 죽게 된다며 조심하라던 쿠로토의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엉망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단정한 검사의 가면으로 가린 히이로는 바닥에 나뒹구는 겐무를 노려보았다.
단 쿠로토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그곳에 머물었던 카가미 히이로는 누가 볼 새라 오피스텔로 돌아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집을 뒤엎었다. 밝은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릴 거라며 사줬던 스웨터,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두르고 다니라던 목도리. 그의 잔재는 제 머릿속뿐만 자리한 게 아니었다. 그는 카가미 히이로라는 인간을 이루는 모든 것에 낙인을 찍은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것 전부를 큰 쇼핑백에 쓸어 넣던 히이로의 눈에 들어온 건 핸드폰에 달린 키링이었다. 단 쿠로토가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내 짓밟았던 그것.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과 키링을 양손에 쥔 채 잡아당겼으나 힘이 들어갈 리 만무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긴 했나.”
이 상황에서 사랑을 논하는 자신이 우스워서 헛웃음이 터졌다. 벌겋게 짓무른 눈가가 쓰라렸다. 그렇게 오래 울었는데도 눈물은 마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불투명하게 번져 손에 쥐고 있던 키링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이 관계를 주위에 숨기는 것도 한계였으니까.
히이로는 축축하게 젖은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키링을 핸드폰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마음속에 남은 감정을 꾹꾹 눌러 담듯 손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힘을 주다 손의 온기를 옮겨버리고 나서야 쇼핑백에 던져 넣을 수 있었다. 활활 불타던 사랑은 눈물에 쓸려 미지근하게 식어버렸으므로. 히이로는 진심으로 그 키링에 자신의 죽어버린 사랑이 봉해지길 바랐다.
“……쿠로토 씨.”
꽤 큰 크기의 쇼핑백이었음에도 그가 남기고 사라진 흔적은 너무나도 커서 히이로는 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묻어났다. 내일 CR에 출근하면 그와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리고 몰이해의 사랑을 속살거릴 테다. 히이로 역시 다른 이들에게 단 쿠로토가 그 우리를 방해하던 보랏빛 가면라이더라는 걸 알려야 했다. 밀려오는 압박감에 머리가 아팠다.
“……왜 하필 당신이었을까, 쿠로토 씨.”
후회를 담은 입매가 일그러졌다. 이제 되돌아갈 수 없는데도. 찰칵, 열쇠로 문을 잠갔다.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GAME CLEAR!
상황에 맞지 않게 경박한 음성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로질렀다. 샤카리키 스포츠를 사용한 가면라이더 겐무의 라이더 게이지가 0가 된 것을 클리어 조건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무어가 바뀌는 건 없었지만. 겐무는 여전히 살아있고 겐무가 단 쿠로토라는 사실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히이로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핏대를 세워 울부짖으며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카론의 나룻배에 올라타는 그의 손을 잡아당기고 싶었다. 아니, 사실 사해死海의 뱃사공은 단 쿠로토 본인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다시 내 손을 잡는다면,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있을까.
기사의 갑옷을 두른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幻夢을 꾸며 허하게 웃었다. 텅 비어버린 눈물샘이 올라간 입술을 따라 짓눌려 비명을 질렀다.
얼떨결에 겐무의 게이머 드라이버에서 튕겨 나온 샤카리키 스포츠 가샤트를 잡아챈 에그제이드는 몸을 추슬러 일어선 겐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붉게 삑삑대는 라이더 게이지를 내려다본 겐무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히이로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슈트로 가려져 그가 자신을 보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데도 히이로는 쿠로토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확신했다. 변신 후 고정되는 슈트는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Gashoon!
패배를 인정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 겐무가 대응해오지 않을 거라 확신한 건지 에그제이드를 필두로 CR의 가면라이더는 변신을 풀었다. 드래고 나이트 Z의 꼬리로 내리쳐 갈라진 틈 위에 선 겐무는 천천히 게이머 드라이버의 레버를 돌렸다. 멀쩡해 보였던 건 그저 죽기 직전의 살얼음 위 찰나의 유예였는 듯 보랏빛 슈트가 서서히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카가미 히이로는 데이터로 산화하는 죽음을 조용히 응시했다. 어떤 매커니즘으로 그가 당장 사라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목숨이 스러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그 자신이 설계했으니까.
―치명적인 공격을 받아서 라이더 게이지가 0으로 바뀔 거 같으면 자동으로 변신이 풀리도록 해뒀어.
―그렇게 될 리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강력한 버그스터라고 해도 이쪽의 가면라이더는 4명이나 되는데요.
―혹시 모르잖아. 게임에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까.
부드럽게 속삭이며 게이머 드라이버를 챙겨주던 손길이 생겨나 히이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따금 불쑥불쑥 튀어나와 히이로의 마음을 헤집었다. 옆에서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키리야의 시선을 못 본 척했다.
“설마하니 이렇게 될 줄 몰랐는걸.”
자색의 눈동자 아래로 흘러나온 나른한 목소리는 변조를 거치지 않은 채였다.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는 여유가 넘치는 말투였다.
Gashoon!
히이로는 변신을 풀고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는 쿠로토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변조하지 않은 시점부터 겐무는 단 쿠로토라는 걸 알린 것과 다름 없었다.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히이로였지만 의심을 받아선 곤란했다. 카가미 히이로는 CR에 그의 정체를 폭로하지 않았으니까.
―의외네, 히이로 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던 표정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히이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뺨에 닿는 시선이 따가울 지경이었지만 짧게 되살아난 기억에 잠긴 히이로는 눈치채지 못했다.
“……사장, 님?”
“봐, 내가 말했잖아?”
강렬하게 와닿은 시선이 사라졌다. 아랫입술을 혀로 쓸자 잇자국이 선연하게 남은 게 느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놀란 사람을 연기하며 아랫입술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충격을 받은 듯 호죠 에무는 말을 더듬었지만, 쿠죠 키리야는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며 어깨를 세웠다. 하나야 타이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침묵했으나 히이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날 이후 히이로는 제게 각인된 그의 모습을 떨쳐내려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수술에 뛰어들었다. 피곤하지 않겠냐는 간호사의 걱정 어린 말이나 내 아들이 하는 수술이라면 뭐든 성공할 테지만 휴식은 필요하다던 하이마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CR에서 쿠로토와 마주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급한 수술 일정이 들어왔다며 사라진 에무를 붙잡지 못해 쿠로토와 단둘이 남게 되자 숨이 턱 막혔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 안 했나 봐? 역시 히이로 군은 착하네.
“……닥쳐라, 단 쿠로토.”
―쿠죠 키리야는 원래 그런 성격이니 그렇다 쳐도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히이로 군이 내 정체를 폭로하지 않았을 줄이야.
순수하게 감탄하는 어조였지만 히이로에게는 조롱으로 들렸다. 까맣게 침잠한 눈동자가 곱게 휘며 이를 악문 히이로의 얼굴을 고스란히 비추었다. 더 대화하는 건 감정 소모에 불과했다. 그의 말은 전부 옳았다. ‘가면라이더 겐무’는 CR의 적이었고 히이로는 단 쿠로토가 겐무라는 사실을 CR에, 위생성에 알렸어야 했다. 왜 자신은 그의 정체를 폭로하지 못했나. 순간적으로 잠가버린 문이 생각났다. 열쇠도 폐기했으니 다신 들어갈 수 없는 방일 터인데도 틈을 비집고 계속해서 나타나는 형태 잃은 사랑이 괴로웠다.
―날 사랑하니까 그런 거겠지?
“그럴 리 없잖아……!”
얇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쭉 올라갔다. 독니를 빛내며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저건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나락이다. 끌려가면 다신 나올 수 없는 심연의 수렁일 테다.
―아니, 히이로 군은 날 사랑하는 거야.
매끈하게 뻗은 손가락을 뻗어 턱을 들어 올렸다. 키가 많이 차이가 나 내리깐 것처럼 느껴지는 눈동자가 이채를 띠었다. 당장이라도 제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뱀이 가늘게 웃었다.
―내가 히이로 군을 사랑하듯, 히이로 군 역시 날 사랑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해왔던 키스는 가식이라고 말하듯 입맞춤은 격렬했고 거침없이 세운 송곳니가 입술을 찢었다. 억지로 입술을 벌린 살덩이와 함께 피가 쏟아졌다. 비린 피 냄새가 코를 마비시키고 나서야 그는 히이로를 놓아주었다. 눈물에 맺힌 눈물을 피로 진득하게 얼룩진 혀로 훔쳐낸 쿠로토는 그대로 입술을 내려 뺨에 꾹 눌렀다.
―또 찾아올게, 히이로 군. 사랑해.
머리 정리를 끝내고 더러워진 정장을 탁탁 털어내는 단 쿠로토는 여상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단정했던 정장이 너덜너덜해진 몰골이었음에도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여유가 넘치는데. 죽을 때가 되니까 실성했나?”
이죽거리는 타이가의 목소리를 듣자 히이로는 숨을 들이켰다. 그래, 저 사람은 이제 죽는 거였지. 저렇게 여유롭다 해도 자신이 만들어낸 규칙을 어길 수 없으니.
이제 만족해?
모습 없는 악의가 귀를 간질인다. 눈앞이 빙글 돌았다. 단 쿠로토가 죽기를 바란 적이 있던가. 아니면 지금 상황에 슬퍼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제가 원하지 않은 모습이어서 침착하게 유지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럴 리가. 게임 마스터인 내가 죽을 리 없잖아?”
죽음을 닮은 자색의 무기가 흩어지던 데이터를 그러모았다. 무섭게 삑삑대던 라이더 게이지가 빠른 속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술렁이는 주위의 반응과는 달리 히이로는 누구도 보이지 않게 살짝 몸을 휘청였다. 단 쿠로토만이 제 모습을 알아보았을 테다. 그는 계속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내가 죽지 않아서 실망했어, 아니면 안도했을까?”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쏟아지는 욕설과 경멸 섞인 시선에도 어떤 대응도 하지 않던 단 쿠로토의 시선은 히이로에게 꽂혀 있다. 넌 뭐라고 답할까. 한 줄기 빛도 통과하지 못해 거무튀튀해진 눈동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히이로를 비웃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버그바이저를 휘둘러 바이러스가 깃든 연기를 살포한 쿠로토는 그대로 사라졌다. 죽음을 뛰어넘은 광기의 눈빛은 사라지는 와중에도 히이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 * *
“히이로 씨는 혹시 알고 계셨나요, 쿠로토 씨가 겐무라는 거.”
“……왜 그런 걸 묻지? 당연히 아니다.”
같은 나이인데도 한없이 앳된 얼굴의 연수의는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다.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투명한 검에 베일 것 같았다. 천재 게이머는 눈치도 좋아야 하는 건가.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실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빠르게 표정 관리를 하며 히이로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알았다면 진작에 알렸겠지.”
“……그렇, 죠. 그렇겠네요. 그 히이로 씨인걸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가샤트를 쥔 것처럼 돌변했던 눈빛은 다시 순한 눈매로 돌아와 있었다. 느릿느릿 눈을 감은 호죠 에무는 그저 그렇게 대답했다. 가볍게 돌아온 대꾸였지만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는 어떤 것을 수긍했던 걸까. 카가미 히이로가 그런 인물이 아니라는 것? 아니면, 카가미 히이로가 의도적으로 단 쿠로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것? 그리고 그 이유가 고작 채 버리지 못한 어리석은 미련이라는 것도?
그렇겠네요. 그 히이로 씨인걸요.
바싹 메말라 있던 목소리가 한참이나 귀에 맴돌았다.
* * *
―결혼제도는 사실 과거에 행해지던 약탈혼의 연장선이라는 거 알고 있어?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요.
히이로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두며 뜬금없는 말을 꺼내는 쿠로토를 향해 불퉁한 시선을 보냈다. 결혼이라는 단어는 두 사람이 대화할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는 걸 진작에 깨달은 탓이다. 그런데도 가끔 그는 저런 앞뒤 없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눈을 가늘게 뜬 쿠로토는 그저 웃기만 했다. 무어라 말을 계속해보라는 눈치여서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가라앉아 속이 더부룩했다. 입안에서 감돌던 달콤한 생크림은 어디 간 건지 불쾌한 찐득거림만 남았다. 흑요석을 빼다 박은 눈동자가 선명하게 히이로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요. 어차피…….
―어차피 ‘우린’ 결혼을 못 하니까? 히이로 군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케이크를 자르고 있던 나이프를 쥔 손이 잠시 멈칫했다. 왜 저런 주제를 꺼낸 건지 모르겠다. 일본은 동성혼을 허용하는 나라도 아닌 데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연애를 하자고 한 건 다름 아닌 단 쿠로토 본인이었다. 반듯하게 한입 크기로 자르고 있던 케이크가 나이프에 눌려 뭉개졌다.
―글쎄? 방금 말했잖아. 결혼은 약탈혼의 연장선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라고…….
―아직도 모르겠어?
빙그레 올라가는 입술이 야살스럽다. 색정적인 의도가 적나라하게 배어난 손길이 뺨에 닿았다. ‘사랑하는 상대’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입술에 묻었던 생크림을 혀로 쓸어낸 자국을 엄지로 꾹 누르며 단 쿠로토가 입을 뗐다.
―난 사랑하는 걸 절대 놓치지 않아.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똬리를 튼 뱀이 즐겁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홧홧한 온기가 입술에 내려앉았다. 분명 사랑이 가득한 행위일 텐데도 닿은 입술이 펄펄 끓는 열기를 담고 있어서 히이로는 그대로 불타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
눈물이 차올라 습윤해진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꼬리를 타고 투명한 길이 뺨을 가로질렀다. 언젠가의 행복했던 나날의 꿈이다. 히이로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은 채 팔뚝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자는 내내 울었던 건지 부르튼 눈두덩이가 알싸하게 아팠다. 꿈속의 단 쿠로토는 상냥함을 연기했고 사랑을 속삭이며 입술을 맞대어왔다. 제삼자의 거리에 선 카가미 히이로는 그제야 그의 모든 모습이 가식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귈까.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줘.
―사랑해, 히이로 군.
어떤 속삭임에도 진짜 사랑은 없다. 그는 한 번도 진실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절절한 광기에 젖어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평행선으로 귀결했다. 아마 소유욕에 가까운 것일 테다.
“……그건, 사랑이 아니야.”
다정한 표정을 덧씌우고 갈급하게 몸 구석구석을 씹어 삼키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 온몸이 욱신거렸다. 한동안 쿠로토가 나오는 꿈을 꾸지 않았는데 이런 꿈을 오랜만에 꾼 것은 며칠 전, 단 쿠로토라는 인간이 이 세계에서 소멸한 탓일 것이다. 버그바이저에 꺼져가던 생명을 담아 제 생生을 억지로 세계에 묶어뒀던 그는 묶인 실을 끊어내는 것으로 죽음에 도달했다. 운명의 실을 뽑는 여신, 클로토クロトー의 이름을 가진 이의 말로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난 죽지 않아, 히이로 군. 신은 불멸의 존재니까.
정체를 드러낸 이후 다른 이 앞에서 절대 다정하게 히이로를 부르지 않았던 쿠로토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인간을 벗어나 신이 되었다며 허황한 말을 주창하던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얼룩진 상태였다. 변신을 풀지 않은 히이로와 달리 진작에 변신을 풀고 의연한 표정으로 쿠로토의 죽음 앞에 선 호죠 에무는 들릴 듯 말 듯 그렇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쿠로토 씨.”
―또 만나, 히이로 군.
카가미 히이로는 단 쿠로토라는 존재가 얼마나 제게 독이었는지 새삼 느끼고 말았다. 산산이 부수어져 조금씩 흩날리기 시작하는 데이터를 눈앞에 목도한 것만으로 히이로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가샤콘 소드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그를 베었던, 그를 이 세계에 묶어두었던 실을 끊어냈던 메스였다. 의사 실격이군. 히이로는 멍하니 생각했다.
―사랑해.
그의 말처럼 다시 만나건 영원히 이것으로 그와 이별이건 카가미 히이로는 그를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허공에 스러지는 것을 본 순간부터 겐무幻夢라는 이름답게 형태 없는 꿈에 끌려가 허우적대고 있었으니까. 차라리 그가 다시 돌아오길 바랐다. 어떤 수단이든 좋았다. 단 쿠로토가 정말로 죽어버리면, 그것도 제 손으로 죽여버린 순간부터 카가미 히이로는 그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으니. 보랏빛 데이터가 전부 사라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목을 영원히 조를 테다. 그가 없으면 말라비틀어질 존재가 될 때까지.
그에게 가지 않으려 노력하고 미친 듯이 떨쳐내며 검을 휘둘렀던 모든 과정은 결국, 그에게 속박되는 길이었다.
* * *
“괜찮으세요, 히이로 씨?”
“……왜 그런 걸 묻지, 연수의?”
“그야…….”
말갛게 웃으며 장난스레 어린 환자와 놀아주던 연수의는 이제 없었다. 까맣게 죽은 눈동자가 옅게 미소했다. 저주처럼 남은 잔재가 다른 이에게도 손을 뻗친 것이다. 그저 카가미 히이로의 주변 인물이라는 이유로. 순수함을 잃은 소아과 의사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가.”
“……히이로 씨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평소라면 주제넘은 말이라며 화를 낼 법한 당돌한 태도였다. 히이로는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래, 하고 대꾸했다.
그럴 리 없지.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 * *
가면라이더 크로니클은 그 단 쿠로토가 만든 것 치고는 조악한 편이었다. 아니면 사용자가 다른 이여서 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빠르게 가샤트로피를 모으고 게우데우스를 소환하고 버그스터의 완전한 근절을 위해 백신 개발을 시작하고…….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카가미 히이로는 단 쿠로토의 환영에 시달려야 했다. 그나마 수술할 때만큼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에 감사해야 할까. 허하게 웃으며 히이로는 건너편에 앉은 망령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사랑해.
망령은 단 한 가지 단어만 되풀이했다. 입력된 말이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가끔 오류가 난 것처럼 지지직거리긴 했지만, 망령은 쉴새 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고장 난 사랑의 마지막 모습은 비참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되풀이하는 꼴이라니.
단 쿠로토는 끝까지 카가미 히이로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신이 되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지고 나아가 백신을 개발하는 시점에 도달했음에도 떠나버린 이는 그대로 사라진 채였다. 히이로는 눈앞에 놓인 서류를 노려보고 있었다. 쿠죠 키리야가 작성한 빼곡한 서류에는 프로토 가샤트와 희생자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희생자 목록의 맨 끝에는 단 쿠로토라는 한자 석 자가 적혀 있다.
―사랑해.
“……당신은 이런 나라도 사랑하나.”
우습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되뇌던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광기로 점칠된 얼굴로 사랑을 속삭이던 망령은 입을 다물고 히이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히이로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아집처럼 남아버린 어그러진 사랑을 이유로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쓴 버그스터로 만들어버려도 그는 기뻐할까. 히이로는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 생각했다. 한 번 터진 조소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며칠이나 악몽에 시달려 잠들지 못한 몸은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히이로는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심신을 지치게 하는 게 망령을 떨쳐내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망령의 후유증이 남지 않은 건 아니었다. 찌꺼기처럼 남아 부유하는 조각에 홀려 히이로는 이제 아무것도 ‘베어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베는 능력을 잃은 기사는 어느 순간부터 가면라이더로 변신하지 않았다. 버그스터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힘쓰겠다는 히이로의 말에 CR의 의사들은 이견 없이 히이로가 내민 게이머 드라이버와 가샤트를 넘겨받았다. 히이로는 이거로 됐다고 생각했다. 이것으로 단 쿠로토와의 연을 하나 또 ‘잘라낸’ 것이 된다. 목 안쪽이 열로 들끓었다.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히이로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망령에 시달린 기사는 심연에 허우적대며 무너졌다.
“히이로 씨, 지금 밖에……!”
“……무슨 일이지, 연수의? 노크는 해줬으면 하는데.”
자다 오기라도 한 건지 까치집을 한 머리로 나타난 에무는 눈 밑이 거뭇거뭇한 히이로를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단 쿠로토의 절절한 연정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쓴 광기를 엿보았지만, 히이로에게 무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호죠 에무만 제외하고. 나락에 처박힌 기사를 어떻게든 건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기꺼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히이로를 바라보는 에무의 눈동자에는 연민이 스쳤다. 속이 울렁거렸다.
“……어제 입원했던 게임병 환자 기억나시죠? 방금 키리야 씨가 치료하려고 가샤트를 사용했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에무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히이로가 대꾸하자 에무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에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꺼끌꺼끌했다. 어디서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겨우 얼기설기 이어붙인 것이 깨지는 소리다.
“……완전히 새로운 바이러스로 변이한 게 아닌가 싶어요. 치료는, 실패했습니다.”
의사는 그 누구보다 비정한 사람이 된다. 메스를 쥐고 살을 가르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고치고 다시 꿰맨다. 신이 될 수 없는 의사는 그 노력의 끝에도 스러지는 생의 마지막을 유가족에게 덤덤히 고할 의무가 있었다. 생사가 오가기 쉬운 외과의였던 히이로와는 다르게 소아과인 에무는 확연히 다르게 와닿을 것이다, 환자의 죽음이라는 건.
“증상은?”
“그게…….”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에무는 결국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꾹 닫았다. 환자의 죽음을 처음 목격한 충격인가. 히이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곤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어색한 위로에도 에무는 고개를 떨군 채 히이로의 시선을 피했다.
“……대 선생. 왔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CR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을 반겼다. 감찰의이자 가면라이더 레이저, 쿠죠 키리야다. 평소처럼 껄렁한 하와이안 셔츠에 까만 선글라스 대신 의사다운 옷을 입고 있던 쿠죠 키리야는 폭주 바이크 가샤트를 빙글 돌렸다. 장난스러운 말투며 행동은 여상했으나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자조하듯 음울해 보였다.
“환자는 어디 있지?”
“에무가 얘기 안 해줬어?”
“……네.”
키리야는 노골적으로 난처하다는 표정을 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감찰의는 살아있는 인간보다 시체에 익숙한 의사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저렇게 돌려 말할 성격이 아니기도 했다. 언제나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서 평행을 유지하는 감찰의는 다른 때엔 장난스러워도 인간의 목숨이 달린 일에는 진지한 태도를 고수했었다. 확연히 이질적인 분위기에 히이로가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낯선 향이 물씬 주위를 뒤덮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쾌하고 녹음이 우거진, 수목원에 온 것 같다. 향을 인지하자 순식간에 숲에 빨려 들어온 것처럼 눈앞이 어질했다. 피톤치드 향이 히이로를 짓누르듯 숨통을 조였다. 컥, 무색의 향이 히이로의 목덜미로 손을 뻗었다.
“……씨, 히이로 씨!”
자신보다 큰 손이 코를 틀어막아 나무 향을 차단하고 나서야 히이로는 정신을 되찾았다. 키리야는 손을 떼어내지 않은 채 히이로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퍽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왜, 히이로는 침묵한 채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된 거지, 방금…….”
“변종 버그스터 바이러스야.”
옥상으로 올라오는 동안 뇌 안쪽을 흔드는 나무 향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꼭 몸 안에 나무가 뿌리를 내린 느낌마저 들었다. 품에 넣어뒀던 선글라스를 낀 키리야는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었다.
“어떤 게임이 기반이 된 버그스터인지도 모르겠고 치료법도 몰라. 가샤트를 사용해도 버그스터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진행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편이야. 대 선생도 방금 겪었겠지만, 전염력도 높은 것 같아. 적합 수술을 받았으니까 대 선생도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야. 미안.”
“괜찮다. 그래서 그 환자는 어떻게 됐지?”
“……나무가 됐어.”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히이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키리야와 에무를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였다. 코를 찌르던 나무 향, 뇌리를 울리는 고통……. 그게 이번 버그스터 바이러스의 증상인가? 표정을 갈무리한 히이로를 보자 키리야는 흐리게 웃었다. 까만 안경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는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믿고 싶지 않거든, 대 선생. 근데 어쩌겠어, 눈앞에서 환자가 나무가 됐단 말이야.”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 키리야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히이로는 그의 입술이 엉망으로 물어뜯겨 피딱지가 가라앉았다는 걸 눈치챘다.
폭주 바이크 가샤트를 기동시키며 에리어가 전개되자 가만히 누워 가쁜 숨을 내쉬던 환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에리어의 데이터가 환자의 몸을 타고 펼쳐지는 것과 환자의 몸에 이변이 생겨난 건 거의 동시였다. CR 침대에 뻗고 있던 다리는 거멓게 죽어 단단하게 변하며 그대로 침대를 부수고 땅에 뿌리를 내렸다. 원래 다리였던 뿌리에 처음 보는 꽃을 피워낸 환자이자 나무로 화한 ‘그것’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피부가 뻣뻣해지며 목질로 변하는 과정은 기괴함 그 자체였다. 길게 늘어난 손가락은 그 모양을 그대로 본뜬 잎사귀가 되어 형광등을 가렸다. 인공적으로 생겨난 나무 사이에 비치는 빛줄기木漏こもれ日가 사방으로 갈라져 바닥을 관통했다. 온갖 색색의 꽃망울이 터지며 꽃가루를 흩뿌렸다. 풀 내음이 훅 끼쳤다.
“이, 이게 무슨……!”
“일단 나가, 에무!”
가면라이더 레이저는 하다못해 스테이지를 바꾸려 했지만, 변이된 바이러스는 그것을 쉬이 용납하지 않았다. 게임 에리어는 바닥을 파고든 뿌리에 고정된 채 양분이 될 인간의 생명을 흡수하고 있었다. 사방에 진동하는 나무 향이 그 증거였다. 조금 향을 맡은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술을 진탕 마신 사람처럼 휘청이는 몸뚱이는 저절로 한가운데에 신목神木으로 화한 환자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빠르게 변신을 해제하고 뺨을 내리쳐 억지로 정신을 되돌린 키리야는 몽롱하게 신목을 바라보는 에무를 질질 끌고 CR에서 탈출했다. 문이 닫히는 그 짧은 순간, 나무껍질에 뒤덮이던 환자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이 보였지만 애써 외면했다.
환자를 두고 왔다는 키리야의 말에 히이로는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당장 백신도, 버그스터의 정체도 모른다지만 가면라이더가 게임병에 걸려 죽어버린다면 그만큼 의료진이 사라진다. 게다가 카가미 히이로는 더는 가면라이더로 변신할 수 없다.
“일단 CR은 폐쇄해야 할 것 같아. 일반인은 근처에 가기만 해도 게임병 환자가 될 테니까.”
“그럼 고칠 수 있는 방도가 없잖나.”
“우리가 걱정해야 할 부분은 그게 아닐걸.”
키리야는 드물게 말을 아꼈다. 어둡게 칠해진 안경알 너머의 눈은 이미 거멓게 죽었을 것이다. 단 쿠로토의 광기에 휩쓸려 모든 것을 이해한 연수의처럼, 반쪽짜리 사랑을 버리지 못해 망령에 시달리는 카가미 히이로처럼. 그리고 히이로는 그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고층의 건물 옥상에서도 소리 높은 아비규환이 울려 퍼지고 있었으니까. 겨우 떨쳐냈던 나무 향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판데믹인가.”
“맞아. 이건 우리끼리 해결 못 해. 버그스터 바이러스에 대해 우리가 아는 정보는 단편적이니까. 그, 방법이 있긴 한데.”
키리야는 답지 않게 히이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에 담긴 연민, 미안함, 희미한 흥미로움을 엿본 히이로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깨달았다. 버그스터 바이러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처음 바이러스를 발견하고 호죠 에무에게 감염시켜 제로 데이를 일으켰던 단 쿠로토를 프로토 가샤트에서 끌어내겠다는 거다. 히이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이라 주장하던 이가 떠난 날 이후 다른 이들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눈치챘을 것이다. 유감스럽다는 듯 비스듬하게 시선을 돌리는 키리야의 행동에도 히이로는 마음에 번지는 모순적인 희열에 시달려야 했다.
단 쿠로토가 자신의 눈앞에서 살아 숨 쉬며 사랑을 지껄일 것이다. 한때 신이었을 모를 남자는 한낱 버그스터로 추락해 제 앞에 설 테다. 그래도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을 테지.
―사랑해.
―사랑해.
그리고 그 일련의 행동은 본 적 없는 바이러스로 일어난 판데믹의 진정을 위한 고귀한 행위가 될 것이다. 추잡하고 질척이는 집착으로 변모한 제 반쪽짜리 사랑이 아니라. 카가미 히이로는 조용히 키리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야는 괜찮다는 표시로 이해했겠지. 옆에 선 에무도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아니었다.
히이로는 제 사랑이 일그러지다 못해 망가졌음을 인정했을 뿐이다. 망령에 사로잡힌 기사는 자색의 망토를 두르고 핏빛의 검을 들었다.
* * *
인간이 오랜 시간에 걸쳐 빚어낸 문명은 쉬이 무너지는 것이라는 걸 카가미 히이로는 고작 일주일도 안 되어 깨달았다. 나무, 꽃, 허브 등으로 변한 이들은 버섯이 포자를 터뜨리듯 사방에 바이러스를 퍼뜨렸고 그것에 닿는 족족 인간은 식물로 변화했다. 어느 누군가는 인류의 업보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신의 저주라고 했다. 척 봐도 사이비로 보이는 남성은 처음 듣는 이름의 신을 부르짖으며 자신은 신의 대행자이니 자신을 따른다면 구원받을 거라 소리쳤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TV를 꺼버린 타이가는 구석에 등을 기댄 채 선 남자, 단 쿠로토를 노려보았다.
CR에 돌아갈 수 없는 의사들은 자연스레 카가미 히이로의 집으로 모였다. 제일 크고 방이 많다는 이유였다. 히이로 역시 불평하지 않았다. 언젠가 문을 잠가버린 방만 사용하지 말라는 게 조건이었다. 그리고 지금껏 조사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모아두었던 프로토 가샤트를 꺼냈다.
……미안해, 히이로.
잿빛으로 죽은 게임 화면으로 들어가기 전 뽀삐가 낮게 속삭였다. 조용한 분위기였기에 모두가 들었을 테지만 다른 이들은 애써 듣지 못한 척을 해주었다. 히이로는 괜찮다는 표시로 고개를 저었다. 이 중 아무도 히이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상실을 마주하고 난 후에야 깨달은 미쳐버린 사랑의 끝에 도달한 인간의 마음 따위.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글쎄, 난 저런 대행자를 둔 적이 없는데.
“지금이 장난칠 때냐?”
성큼성큼 걸어가 타이가는 쿠로토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아니, 틀어쥐려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워프해 손길을 피한 쿠로토는 영혼이 빠진 것처럼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만 내려다보는 히이로의 곁에 섰다. 순식간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버그스터로 부활시킬 수밖에 없고 원래라면 네 놈이 아니라 다른 희생자를 먼저 데려왔을 거고 이 일이 끝나면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구구절절한 타이가의 말을 자른 쿠로토는 뚜벅뚜벅 걸어 하얗게 질린 표정의 히이로에게 다가왔다. 그때도 지금처럼 다른 이들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하고 숨을 멈췄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게 중요한 건, 이제 아무 방해 없이 히이로 군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거니까.
입술을 달싹이면서 뻐끔대는 히이로의 손을 잡아끈 쿠로토는 얄궂게 웃었다. 들려? 히이로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런 고동도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심장과 그와 대조적으로 모든 걸 불살라버릴 것처럼 거센 불꽃은 텅 비었던 반쪽을 채우기 충분했다.
……히이로 씨한테서 떨어져요, 쿠로토 씨.
숨도 쉬지 못한 채 뻣뻣하게 굳은 히이로를 어떤 식으로 해석한 것인지는 몰라도 에무는 거세게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어 쿠로토를 밀쳐냈다. 억지로 현실로 끌려 온 신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 히이로 군이 적응할 시간은 줘야겠네.
쿠로토 씨는 저 버그스터 바이러스에 대해 정보만 주면 특수 처리된 데이터 감옥에 들어가게 될 거에요.
에무는 빠르게 제 할 말을 재깔였다. 단 쿠로토가 어떤 현혹된 말을 히이로에게 속삭이지 못하도록. 그의 심정을 자비로이 이해하겠다는 것인지 쿠로토는 눈을 가늘게 뜰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놓고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쉰 키리야는 어깨를 으쓱이며 노트북을 켜 영상을 틀었다. CR에 설치된 카메라의 영상이었다. 명칭 없는 버그스터의 첫 피해자가 기괴하게 변하고 그걸 막지 못하고 도망치는 모습까지. 충분히 편집할 수 있을 텐데도 키리야는 끝까지 영상을 틀었다.
―꼭 다프네 같은데. 유명한 신화잖아? 사랑을 거부한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신화.
헛소리 말고 해결책을 내놔. 네 존재 가치는 그게 전부니까.
태평하게 다리를 꼰 채 영상을 본 쿠로토가 나직하게 신화를 운운하자 화가 치민 것인지 타이가가 욕설을 뱉어냈다. 음, 쿠로토는 가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난 저런 내용의 게임은 만든 적이 없어.
……뭐?
―나도 저 버그스터 바이러스는 처음 보는 거라는 뜻이지.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어.
그의 말처럼 단 쿠로토라는 과거 신이었던 존재는 이 상황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고의성이 다분할지도 모른다며 길길이 날뛴 타이가를 말린 건 키리야였다. 저 자존심 높은 인간이 가짜로라도 못한다고 말할 리 없다는 이유를 들어 타이가를 진정시킨 키리야는 팔짱을 낀 쿠로토를 바라보았다.
신神이 어떤 생각을 하는진 몰라도 적당히 하는 게 좋아.
그게 쿠죠 키리야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차피 방법이 없다면 직접 부딪혀야 하지 않겠냐며 만류하는 뽀삐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나섰으니까. 당연히 돌아오지 않는 그의 뒤를 따른 건 에무였다.
저는 의사니까요.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의사.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이 어떻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가끔 쿠로토가 데이터로 변해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그게 밖의 동태를 보러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조용히 사라졌다가 소리 없이 돌아오면서 매번 꽃을 꺾어왔다. 자연에서 피어날 것 같지 않은, 환자였을 인간의 피를 한껏 머금어 검붉게 변한 장미, 보랏빛으로 물든 리시안서스, 희게 피어난 안개꽃. 전부 웨딩 부케로 사용하는 꽃들이다.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에서 벗어난 이들에게서 꽃을 꺾을 수 있다는 현실이 우스꽝스러웠다. 그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타이가 역시 옷을 챙겼다. 매번 입고 다니는 군복 바지와 어울리게 이름과 혈액형, 생일이 새겨진 군번줄을 건 채였다.
무면허 의사라도 가봐야겠지. 도련님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변신하지 못하더라도 도련님은, 끝까지 의사일 테니까.
―멍청한 선택이야, 하나야 선생.
화병에 꽂아두었던 꽃을 하나씩 뺀 쿠로토는 짧게 그를 질타했다. 그 말을 무시한 타이가는 등에 가방을 들쳐 맸다. 손에는 가샤트를 쥐고 있었다. 인류를 위협하는 생명체를 향한 분노와 저항이 담긴 총이다.
의사는 한 명으로도 충분해.
히이로는 가만히 모두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 이미 변신할 수 없는 가면라이더는 쓸모가 없는데도, 의사가 되어 환자를 구해야 하는데 동시에 의사가 죽어버리면 더 많은 희생자가 생길 거라는 얄팍한 사고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자신이 우스웠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히이로 군.
꽃들을 한데 모아 그럴싸한 부케를 만들어낸 쿠로토가 낮게 속삭였다. 망가진 기사가 말 그대로 생명이 피워낸 꽃을 든 신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썼을 뿐인 신과 기사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서야 제 사랑을 긍정했다. 망가지고 일그러졌으며 더럽혀졌는데도 진창 속에서 빛날 제멋대로의 사랑을.
―결혼할까, 히이로 군.
―사랑해.
―“사랑해.”